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인트루이스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779년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든 이래, 영국 정부는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에 주둔한 스페인군이 북미 독립 세력과 합세하여 미시시피 강을 장악한 후 동진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미시시피 상류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장악해 적이 미시시피 강을 확보하는 걸 저지하기로 했다. 세인트루이스 마을은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18마일 떨어진 곳에 설치된 곳으로, 1764년 프랑스 상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7년 전쟁]] 시기 프랑스는 스페인이 자국과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는 대가로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스페인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곳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세인트루이스를 지키기 위한 병력, 보급품, 자금 등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세인트루이스엔 약 900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프랑스인들이었고 스페인군은 소규모로 존재했다. 주민들은 주변의 인디언들에게서 모피를 구입하고 그 대가로 총기를 지급했고, 인디언들은 총기를 구매한 후 다른 부족들과의 전쟁에 써먹었다. 이때문에 미네소타, 아이오와, 위스콘신 일대에 거주하던 [[수우|수 족]]과 위네바고 족은 자신들의 라이벌 부족에게 총기를 공급하는 세인트루이스 주민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이 두 부족은 [[미시시피 강]] 건너 동쪽 둑에 있는 영국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 편을 들었다. 1778년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총독 페르난도 데 레이바는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한 뒤 조지 로저스 클라크가 이끄는 독립 지지파 민병대에게 물자와 자금을 공급해줬다. 클라크는 스페인의 지원을 바탕으로 애팔래치아 서부 일대의 영역을 확대했다. 하지만 1779년 스페인이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세인트루이스는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군인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거주민은 프랑스인이었으며, 주변에는 그들에게 반감을 품은 인디언들이 많았다. 레이바는 일단 200명 이상의 민병대를 조직했지만, 그들은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대다수는 뱃사공, 농부, 사냥꾼, 상인으로 일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인디언들과 연합해 공세를 개시한다면 세인트루이스를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1780년 초, 미칠리마키나크 요새의 사령관 페트릭 싱클레어는 영국 정부로부터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접수하라는 명령을 전달받고 즉시 에마누엘 해세 대위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조직했다. 얼마 후 레이바는 영국군과 인디언 군대가 연합하여 세인트루이스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마을 앞에 1마일 이상의 참호를 파고 돌탑을 건설하게 했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모아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후 그는 대포를 탑에 배치하고 보병들을 참호 안에 배치해 영국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윽고 5월 25일 영국-인디언 연합군이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발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